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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내게 여름을 사랑하게 해준 건



나는 여름을 싫어했다. 여름이면 빌딩 숲속 어딘가 건물 안에서 에어컨 바람 아래에 있는 것만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겼다. 24년 간 여름은 기쁨이라는 것이 전멸한 계절이라 여겼다.

내 이름에 여름 하() 한자가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된 사람들은 "여름에 태어났어?"라고 질문하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아니, 여름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여름도 엄청 싫어해."하며 나와 아무 상관없는 여름이라는 한자를 이름에 불쑥 넣은 할아버지의 작명을 원망하곤 했다. 가장 싫어하는 계절이 이름에 들어간 사람이라니, 불행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내게 여름을 사랑하게 해준 건 키타 히로시마에서의 고작 이틀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복작거리며 호스트 할머니를 도와 식사를 준비하고, 메밀면을 밀어 소바를 먹고. 배부른 식사를 마치고 나면 푸딩과 라무네, 아이스크림을 다다미방에 늘어져서 먹고. 유카타를 입고 작은 시골 마을 축제에 가고. 꼭 어릴 적 꿈꾸던 비밀 아지트와 꼭 닮은 이름 모를 누군가의 정원에도 가고 말이다. 선풍기 한 대만으로도 충분했던 그 눅진한 여름의 공기. 아무튼 나는 그렇게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다.

하나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세계는 그 하나보다 더 넓어진다는 말처럼, '여름'을 좋아하면서 나의 세계는 더욱 넓어졌다. 여름의 더위를 너끈히 즐길 수 있게 됐고, 나만의 여름 의식이 생겼다. 딱딱한 여름 복숭아를 사서 얼그레이 찻잎을 잔뜩 묻혀 재우기. 차를 냉침해서 냉장고에 시원하게 두기. 시원하고 개운한 음식을 먹거나 짭짤하고 새콤한 음식을 먹기. 드라마 <나기의 휴식>을 보기. 중경삼림 OST를 반복 재생하기.

그렇게 나는 여름이라는 계절이 좋아 나에게 여름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여 주었고, 여름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만나는 요즘을 보내고 있다.

여름이 좋아 나에게 여름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주었지만 나는 때때로 내가 여름을 싫어하게 될까 두렵다. 매년 어쩐지 여름나기가 더 혹독해진다. 최근엔 동료로부터 올 여름은 해 뜰 날이 별로 없을 거라는 뉴스를 전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여름을 위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 어제도 그랬듯 채소 밥상을 차려 먹고, 비누 생활을 하고, 그렇게 불완전하지만 지속가능한 삶을 꾸려 간다. 









나와 여름의 시작.

키타 히로시마에서의 추억.









더운 나라의 알록달록한 여름도 그리워요.

언젠가 느긋하게 오래간 즐기고 싶어요. 























나만의 여름 의식.

얼그레이 복숭아 마리네.



















여름이면 최대한 불을 쓰지 않는 채소 요리를 해 먹습니다. 사진은 토마토와 오이, 파프리카가 듬뿍 들어간 차가운 가스파초.

























영화 <중경삼림> 속 배우 왕페이에게 반하여 생에 가장 짧은 머리를 했던 어떤 여름. 블루클럽과 왕페이 그 사이 어딘가이지만, 시원하고 좋았던 날들.

























자전거 출근을 하면 계절따라 점차 바뀌는 빛과 색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어 좋아요.  단점은 아름다운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멈춰서는 바람에 출근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한다는 점.


















이번 여름에 우리는 또 어떤 이상기후를 만나게 될까요. 여름이 오는 건 반갑지만 조금 두렵기도 한 마음으로 여름맞이 옷을 장만했습니다. 다만 새 상품을 사는 것은 되도록이면 지양하고 있기 때문에, 구제시장에서 골라 왔어요. 티셔츠와 니트 가방을 빼고, 착용하고 있는 제품은 전부 중고품입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좋지만 여름에는 냉차만한 것도 없지요.

한껏 땀 흘리고 차가운 냉차를 벌컥벌컥 들이키면 누구나 조금은 여름을 사랑하게 될지도요.

















김하경

@yeoreum.siktak



불완전함을 정체성으로 굴러가는 사람. 좋아하는 계절 여름을 계속 좋아하기 위해 불완전하지만 지속가능한 생활양식을 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때때로 사는 게 싫지만 때때로 사는 게 좋아서 삶을 잘 꾸려보려고 애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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